입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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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04.png 제주 입도 조 한천(蕆)의 행적

고려 왕조 말기, 대제학 한천은 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온건 세력의 대표자로서 중요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공양왕 때 대제학을 지낸 한천은 고려 왕조의 중흥을 모색하며 정몽주와 함께 왕조 재건에 뜻을 두고 있었다. 고려 왕실의 존속을 위해 역성혁명 세력과 대립하는 가운데, 한천은 정몽주와 공양왕의 사위 우성범을 중심으로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이성계 세력의 대표인 정도전을 탄핵하는 등 정치적 공략을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암살하고, 왕조를 지키려던 인사들을 숙청하면서 정치적 세력의 균형은 무너졌고, 한천 역시 유배를 당하게 된다.1392년, 한천은 공양왕이 방치된 가운데 제주도로 유배를 왔다. 그는 제주 정의현에 머물면서 삶의 새로운 장을 열어갔다.

 

유배지에서 한천은 단순히 삶을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실천하며, 유배지 주민들에게 학문과 덕을 전파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제주에 도착한 한천은 향교에서 학당을 설립하고 지역민들을 가르쳤다. 이에 따라 그는 고려 왕조 말기 제주에서 한학의 개척자로 불리게 되었으며, 향약을 정립하여 인화와 예의의 기준을 세우고자 했다.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 인문학적 풍토를 조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한천은 제주민들에게 존경받게 되었다.고려사와 제주향교지에 따르면, 공민왕 20년(1370) 2월 한천은 경상도순문사에 임명되었고, 공양왕 3년(1391년)에는 판개성부사로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그의 정치적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 중에도 그는 지역사회에서 학문과 덕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았다.

 

그의 유배 후 거처와 활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의 활동이 단지 유배의 범주를 넘어 제주 지역사회와의 깊은 연관 속에서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한천은 유배 생활 중에도 사장을 개설하고 서당을 세워 지역민을 교훈하는 훈민시덕을 이루며, 학문을 널리 전파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계몽하였다. 그의 사상과 가르침은 당시 제주 사회에서 새로운 변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제주향교지는 한천이 유배 생활 중에도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자 했던 그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향교지에 학당을 세워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도덕과 인의를 강조하며 향약을 통해 지역사회에 인화와 예의를 심어주고자 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유배자로서 생활하지 않고,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려 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그는 제주 지역사회에서 한학의 개척자로서 인정받았고, 후세에까지 그의 업적이 전해지고 있다.또한 한천이 살던 곳에는 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충의사가 세워졌으며, 그 주변 지명들 또한 그의 활동 흔적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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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가 위치한 큰뒷밭을 비롯해 작은뒷밭, 안위연, 동백남밭, 외밭, 서당팟, 절구터, 사장터, 중이왓 등은 그가 거주하며 학문을 펼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모여 배우고 지식을 나누며 공동체를 이루어갔다. 그의 묘는 여전히 마을 가까이에 있으며, 지역 주민들은 그의 덕과 학문을 기억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한천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조선 왕조의 건국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고려 왕조에 대한 충의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삶은 후세에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한천이 처음 집을 지어 살던 곳에 한씨 문중회에서 충의사를 세운 것도 그가 남긴 유산과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묘와 그가 남긴 흔적들은 제주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한천의 충의와 학문적 업적을 전하고 있다. 한천은 유배지에서도 절대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세운 학문적 원칙과 인의 정신을 전하며 끝까지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인화와 예의의 기준을 세우며 학문을 전파했고, 이 땅의 선비로서 중세 제주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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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04.png 제주 입도 조 한천(蕆)의 행적

고려 왕조 말기, 대제학 한천은 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온건 세력의 대표자로서 중요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공양왕 때 대제학을 지낸 한천은 고려 왕조의 중흥을 모색하며 정몽주와 함께 왕조 재건에 뜻을 두고 있었다. 고려 왕실의 존속을 위해 역성혁명 세력과 대립하는 가운데, 한천은 정몽주와 공양왕의 사위 우성범을 중심으로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이성계 세력의 대표인 정도전을 탄핵하는 등 정치적 공략을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암살하고, 왕조를 지키려던 인사들을 숙청하면서 정치적 세력의 균형은 무너졌고, 한천 역시 유배를 당하게 된다.1392년, 한천은 공양왕이 방치된 가운데 제주도로 유배를 왔다. 그는 제주 정의현에 머물면서 삶의 새로운 장을 열어갔다.

 

유배지에서 한천은 단순히 삶을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실천하며, 유배지 주민들에게 학문과 덕을 전파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제주에 도착한 한천은 향교에서 학당을 설립하고 지역민들을 가르쳤다. 이에 따라 그는 고려 왕조 말기 제주에서 한학의 개척자로 불리게 되었으며, 향약을 정립하여 인화와 예의의 기준을 세우고자 했다.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 인문학적 풍토를 조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한천은 제주민들에게 존경받게 되었다.고려사와 제주향교지에 따르면, 공민왕 20년(1370) 2월 한천은 경상도순문사에 임명되었고, 공양왕 3년(1391년)에는 판개성부사로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그의 정치적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 중에도 그는 지역사회에서 학문과 덕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았다.

 

그의 유배 후 거처와 활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의 활동이 단지 유배의 범주를 넘어 제주 지역사회와의 깊은 연관 속에서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한천은 유배 생활 중에도 사장을 개설하고 서당을 세워 지역민을 교훈하는 훈민시덕을 이루며, 학문을 널리 전파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계몽하였다. 그의 사상과 가르침은 당시 제주 사회에서 새로운 변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제주향교지는 한천이 유배 생활 중에도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자 했던 그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향교지에 학당을 세워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도덕과 인의를 강조하며 향약을 통해 지역사회에 인화와 예의를 심어주고자 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유배자로서 생활하지 않고,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려 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그는 제주 지역사회에서 한학의 개척자로서 인정받았고, 후세에까지 그의 업적이 전해지고 있다.또한 한천이 살던 곳에는 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충의사가 세워졌으며, 그 주변 지명들 또한 그의 활동 흔적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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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가 위치한 큰뒷밭을 비롯해 작은뒷밭, 안위연, 동백남밭, 외밭, 서당팟, 절구터, 사장터, 중이왓 등은 그가 거주하며 학문을 펼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모여 배우고 지식을 나누며 공동체를 이루어갔다. 그의 묘는 여전히 마을 가까이에 있으며, 지역 주민들은 그의 덕과 학문을 기억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한천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조선 왕조의 건국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고려 왕조에 대한 충의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삶은 후세에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한천이 처음 집을 지어 살던 곳에 한씨 문중회에서 충의사를 세운 것도 그가 남긴 유산과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묘와 그가 남긴 흔적들은 제주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한천의 충의와 학문적 업적을 전하고 있다. 한천은 유배지에서도 절대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세운 학문적 원칙과 인의 정신을 전하며 끝까지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인화와 예의의 기준을 세우며 학문을 전파했고, 이 땅의 선비로서 중세 제주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